그 의원의 외과 의사 선생님은 어렸던 이국종 교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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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원의 외과 의사 선생님은 어렸던 이국종 교수님께 종종 용돈을 쥐여주곤 했습니다. 이국종 교수님께서는 그곳 의료진이 고마웠고, 의사라는 직업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과연 이국종 교수의 운명은, 그리고 한국 외상외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도착과 동시에빠른 진단, 수술, 집중치료가 이어져야 하므로수술방과 중환자실이 받쳐줘야 한다.-이송 중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며,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야.""여기는 왜 이 카드를 가져온 저같은 환자들을 다른 환자들과똑같이대해주시나요?"중증 의료의 현실을 알고 싶으신 분이국종 교수님이 처음 외상 외과 분야를 전공했을 때, 한국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그는 선진국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UC 샌디에이고 외상 센터에서 단기 연수를 받으며 그는 1~4단계로 분류된 외상 센터, 환자를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헬리콥터의 보급, 곧바로 위험한 환자를 수술할 수 있는 상황에 감명을 받았습니다.<골든아워> 리뷰해 보겠습니다.선진국 기준으로 '예방 가능한 사망'이 우리나라에서는 수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석해균 선장과 이국종 교수이국종 교수님은 줄곧 헬리콥터를 통한 이송 체계의 중요성을 알리셨습니다. 헬리콥터로 20분이면 병원으로 옮길 수 있는 환자를, 앰뷸런스로 옮기려면 2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워에 걸리면 시간은 더 소요되었습니다.당연한 거 아니야?이국종 교수님께서는 외과를 선택하신 후, 외상외과 교수가 되셨습니다. 처음에 그는 단순히 그 분과가 신설되는 분과였고, 그 자리를 선택해야 병원 내에 잔류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직업을 택했지만 곧 그 직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는 그러한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고 싶었습니다. 시스템만 잘 갖춰진다면, '예방 가능한 사망률'을 큰 범위로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그래도,그 길을 걷지 못하더라도, 알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이슈가 된 이국종 선생님의 발언을 보면서는 더더욱 그랬고요.이국종4. 골든아워 뜻3. 아비규환 속 희망선진국의 중증외상 환자 치료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고자 수도 없이 노력하셨으며, 그 과정 중 많은 좌절을 겪으셨습니다. 많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이국종 교수님 덕분에 한국의 중증외상 환자 치료 시스템이 발전해 나갔습니다.아주 미약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닥터헬기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석해균 선장의 상태가 위중한 것도 아니었고 다 쇼였다', '이국종 교수가 헬기를 전용기처럼 활용한다' 등의 거짓 소문이 돌고, 소음으로 인한 민원이 빗발쳤어도 이국종 교수님은 이를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2.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골든아워(golden hour)’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환자를 치료하며 이국종 교수님께서는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손상 통제 수술을 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인공생명유지 장치와 집중치료를 버텨내지 못한 환자들은 죽어나갔습니다.그는 최선을 다해 싸운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힘든 여정을, 이국종 교수는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그러던 중 이국종 교수님을 스타덤에 올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된 한국 인질을 구하던 중, 대장이었던석해균 선장이 6발의 총상을 입고 중상을 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결과는,몇 달 후 어김없이 날아드는 심평원으로부터의 차가운 진료비 삭감 통지서였습니다.마취과부터 혈액은행, 의료진에 이르기까지여러 분야의 의료 자원도 신속히 투입되어야만 한다.어딘가에 부딪히고 깔리거나 떨어져서 혹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해 사지와 뼈들이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경우들이다.그는 그 병원의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네가 왜 그런 걸 신경쓰니?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는 살기 힘들다고 느꼈을 때, 그의 동료인 소화기내과의 한 교수가 말했습니다.이국종 선생,그런 환자들을 보며, 이국종 교수님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긍정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계속해서 외상 외과를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그는 중증외상환자 치료 시스템의 전반적인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좌절과 함께 그는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골든아워이국종 교수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친 상이군인이었습니다. 국민들은 피를 쏟고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싸우어 나라를 지킨 그들을 경멸했습니다.‘에어 앰뷸런스가 없으면그럼에도 사람들은 헬기 소음에 민원을 넣었고, 외상외과의 특수성은 어디에서도 헤아려주지 않았습니다.나는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에게 필수적인 치료를 줄일 수는 없었다.그것들은 줄여야 할 항목이 아니라 환자를 살려낼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기준은 외상외과에 적합하지 않았다.그러면 우리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그는 사활을 걸고 석 선장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언론은 이국종 교수님의 속도 모르고, 석 선장에게서 조금의 생명의 징후가 보이면 이를 대서특필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라는 앵커의 방송이 있던 날 새벽, 다시 석 선장에게 기관삽관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그것은 단순한 논리였다. 바다 위에서 만난 병사들이 그와 같았고 대개의 뱃사람들이 그러했다. 그의 말들이 짙은 쪽빛으로 머릿속을 깊이 물들였다.이 썩어빠진 현실에서 이국종 교수님께서 계속 버텨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습니다. 충분히 환멸을 느꼈을 법한 상황인데...2009년 아주대학교병원에는 중증외상특성화 센터가 설립되고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그의 의료팀이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며 중증외상 치료의 특수성과 중요성이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그 결과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게 되었습니다.)그곳에서 그는 평생 해군 부사관으로 살아온 한 상사와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상사는 한국 고속정의 느린 속도와 빈약한 화력을 염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스템의 개편을 위해 문제를 함장, 전대장, 함대 사령관에게까지 전달하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를 개편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예산 내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가 먼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의 건의는 번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습니다.'적자'라는 단어는 외상외과의 꼬리표가 됐다.본과 3학년 무렵, 이국종 교수님의 집안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아무런 지원 없이 살인적인 의과대학의 커리큘럼을 소화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군대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국종 교수님께서는 해군의 갑판 수병으로 근무하셨습니다.간호사는 대답했습니다.사선을 넘나든 사람은 변할 수 있다.- 헬리콥터를 이용해서라도이송은 신속해야 하고,좋은 하루 보내세요나는 머리를 두드리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 보려 애썼다. 수많은 생각들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은 하나였다.이때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석 선장은 사경을 헤맸습니다. 이국종 교수님은 그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혹은 석 선장에게 굴지의 생명력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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